독서 기록 - 합스부르크 세계를 지배하다 1탄 (가문의 탄생부터 두 왕국으로 나뉘어져 유럽을 지배하기까지)


    책.. 빌려보았읍니다....

    제목은 "합스부르크 세계를 지배하다"

    저자는 마틴 래디 씨

    앞뒤 주석 등등 다 빼고 글 읽는건 500페이지 정도가 되는 두꺼운 책임

    소설은 진짜 고전문학 아니고서야 인스탄트문학 위주로 향유하지만 사회과학이나 역사, 미술사에는 흥미를 가지고 있어서 도서관에서 임보하게된다...
     
     
    대부분의 사진 출처는 영문 위키피디아나 나무위키 검색
     
     


     
    합스부르크 가문 가계도
     

    첫표지랑 목차 넘기자마자 등장하는건 합스부르크 가문의 가계도다


    가계도만 다섯 페이지나 된다


    저자는 가계도를 왜 첨부를 했을까.. 제대로 색인 해둔것도 아닌데..
    근데 이 대충찍은 사진에서도 알수 있듯이 같은 이름 반복되는게 진심 짱 많음




    반복되는 이름을 같은 색으로 체크해봄

    아무리 서양놈들 이름짓는게
    오오 용맹한 우리 할아버지 뫄뫄의 이름을 따서 내 아들 너는 뫄뫄다!!
    하는 놈들이긴 하지만서도 너무 심한거 아닌가..

    그래서 읽는 내내 본문과 이 가계도를 왔다갔다 하면서 읽어야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 있다
    안그러면 같은 놈이 환생해서 일 저지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


    여튼 쉬엄쉬엄 읽으면서 기록을 해나가고자 함
    이 책은 대체역사 소설이 아니고 걍 말그대로 역사책이기 때문에 책에 언급되는 웬만한 사실은 영문 위키피디아에 인물 검색하면 나오므로 내용이 딱히 스포일러라고 보기 어렵고,
    위에서 언급했듯이 언 놈이 누구인지 모르겠어서... 나의 독서 이해를 위한 자기기록 차원이기도 하다

    하지만 당연히 본문 인용은 자제하는 선에서...!!
    저작권은 소듕하니까요.

    합스부르크 가문이 너무 기니까 합가문 합스가문 으로 부를수도 있음.. 내맘임!!!







    1장부터 5장까지


    합스부르크 가문의 시조를 찾으려는 사람들은 많은데 아주 정확하게 밝혀진 바는 없고 지금까지 알려진 합가문 사람 중 가장 오래된 인물은 991년경 세상을 떠난 ‘칸첼린(영문 위키에는 란첼린Lanzelin이라고 기재됨)’ 이라는 사람이라고 함.
    아마 이또한 몰랐다가 뒤늦게 알려졌을 가능성이 있는게, “무리 대수도원” 때문이 아닐까 짐작이 되었다.

    라트보트


    왜냐면 칸첼린의 아들인 라트보트가 이타라는 여성이랑 혼인을 하는데,

    영문 위키에 나온 무리 지도...


    혼인당시에 이타는 라트보트에게서 ‘무리’라는 마을 땅을 선물로 받음.



    Muri Abbey


    이타는 본인이 선물받은 땅에 수도원을 세우는데 그게 “무리 대수도원”임

    그럼 무리 대수도원이 뭔데 그러냐.. 하면 합스부르크 가문 마지막 황제 카를과 그의 황후 치타의 심장이 안치된 곳이라고 함.
    무려 마지막 황제인데 대강 아무데나 안치했을리는 없으니.. ㅇㅇ..
    그뒤로 수도원이 어쩌구.. 하는데 넘 어려워서 무슨말인지 모르겠음..



    합스부르크 성채


    그럼 라트보트는 그냥 수도원 만드는거 구경만 하는 허수애비였던 것이냐 하면 또 그런건 아님... 하비히츠부르크를 만든게 라트보트임.
    독일어는 다 뜯어보면 단어와 단어를 합쳐 하나의 단어로 만드는게 많은데 하비히츠부르크Habichtsburg도 비슷할것으로 추측된다. 일단 부르크Burg는 성이라는 뜻임 ㅇㅇ... 하비히츠라는 단어는 추측되는 단어가 많아서 뭐가 정답인지는 아직 모르는데, "매"라는 뜻을 가진 고대 독일어 단어 하비츠Habicht, Habuh이거나 항구나 안식처 등의 뜻을 가진 하펜Hafen이 어원이 아니겠냐는 추측들이 있다고 함.

    이 하비히츠부르크의 애칭 중 하나였던 것이 ‘합스부르크Habsburg’이고, 심지어 합스부르크라는 이름은 당시엔 잘 쓰이지 않다가 18세기가 되어서야 다시 발굴되어, 그때서야 가문의 이름으로 쓰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스위스의 아르가우 주 지도


    여튼 합스부르크 가문은 스위스 북부의 아르가우 지방의 나름대로 부유한 귀족 중에 하나였다고 함. 12세기부터 합가문은 현실정치에서 줄을 잘 서고 다녔고, 13세기 초 합가문에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나오기도 한다(신성로마제국 황제는 선출+종신직임). 14세기에 이미 성채를 약 30개 정도 보유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그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 감은 안오지만, 합가문이 누구누구 말마따나 완전 허접한 시골촌구석 헐랭이 가문은 아니었다는 게 저자의 설명...


    주변 가문들이 대가 끊기는 바람에 계속 상속자가 있던 합가문이 손쉽게 영토와 세력을 늘리기도 했다는걸 보니 초창기 합스부르크 가문의 세력 확장 비결은 확실히 ‘생존’이었다. 즉 살아남는 놈이 짱먹는 것이다..

    게다가 세대를 몇대 뛰어넘으며 합가문에는 문서위조의 귀재들이 한명씩 있는데, 이 사람들이 합스부르크 가문의 정통성을 창조해낸다. 물론 다 개뻥인게 금새 드러나긴 하지만....


     


    창건자 루돌프

    막시밀리안 1세

     
    사실 왜곡과 부풀리기를 통해 합가문이 얼마나 위대하고 업적이 화려한지를 뭇 백성들이 칭송하게 하는 여론조작 작업도 잘 했던것 같다. 이것을 잘 했던 합가문 사람은 ‘창건자 루돌프’와 ‘막시밀리안’이다. 특히 막시밀리안의 여론조성 기술은 꽤 괜찮은 수준이었던 것 같은게, 자신을 기리는 시나 이야기(소설이나 구전민화 같은)를 잘 만들어서 반포하였다.

    마지막으로, 합가문이 오래 살아남는 데에는 ‘혼인’사업의 성공이 있었다. 부강할 때 더 좋은 집안 또는 비슷한 집안끼리 결혼을 시켰다.
    나는 이 결혼의 효과를 잘 느끼지 못했는데, 그러다 막시밀리안 때부터 조금씩 느끼기 시작했다. 막시밀리안은 자기 아들 펠리페와 딸 마르가레테를 스페인 왕족들과 결혼시킨다. 막시밀리안의 손주들은 헝가리 왕족들과 결혼한다.

    이중에 누구 하나 잘못 죽기라도 하면 상속권이 날아갈 확률도 높았는데, 타이밍도 기가막히지 합가문에 완전 유리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왜냐?

    펠리페... (어디가 미남..인가)


    막시밀리안의 아들 펠리페는 스페인의 펠리페 1세가 되었기 때문이다..





    6장

    6장 제목이 카를 5세(부제: 세계의 통치자)인데 그 당시 세계가 끽해야 영국에서 오스만투르크 까지였던 유럽사람들 눈에는 까를 5세가 세계를 통치하는 것 같았을 것이다.

    막시밀리안 1세
    펠리페 1세
    카를 5세

    막시밀리안 1세가 죽고 신성로마제국은 손자인 카를 5세를 황제로 선출한다. 이게 1519년이고, 카를 5세는 이미 1516년에 스페인 왕위도 물려받는다.(=스페인의 까를로스 1세)
    갑자기 웬 손자? 싶긴 한데 펠리페 1세의 아들이 카를 5세이다.
    막시밀리안은 얼마나 운이 좋은 놈이었는지, 지 아들보다도 오래 산다. 물론 펠리페 1세가 비교적 빨리 죽은 탓도 있겠다.
     
    책에서 말하는 카를 5세가 한일
    1) 신대륙(이라고 쓰고 멕시코와 필리핀이라고 말한다) 발견: 해가 지지 않는... 어쩌구...
    2) 정치적 식견이 탁월하였고, 세계정세를 좌지우지하기 위해 끝없는 결혼 정책을 활용함 (본인마저도...)
    3) 루터의 종교개혁에도 탄압보다는 정치적인 입장에서 존중과 보호를 했음 (본인은 가톨릭인데도)
     
    해가 지고 뜨는 어쩌구... 일 정도로 영토확장을 하고 반란을 줄이는 방식의 융화정책을 사용했지만 한편으로는 돈도 펑펑 쓰고 다녀서 원성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재정적 어려움(본인이 불러일으킴)을 정치적 도구로 활용하는 등 정치 감각도 뛰어났던 것 같다. 결혼 정책을 통해 포르투갈과 프랑스도 그의 영향 아래에 두었고, 카톨릭 신앙 외 다른 신앙들을 박해하였는데 루터의 종교개혁에도 뒤로는 루터파를 보호하는 태도를 견지했다. 카톨릭 일변도였을 당시 분위기를 생각한다면 정치적으로는 탁월했다고 볼 수 있다.
    -고 책에서는 말함.. 실제 종교분야에서의 평가는 또 다르더라고욤? 여튼 논의의 여지가 있는 것으로 ㅇㅇ...
     
    저자는 카를의 치세에 이르러 합스부르크 가문이 그동안 본인들의 허세나 허풍이 아니라 진짜 신화의 주인공이 되어가기 시작했다고 평한다.
     
     
     


     
    7장
     
    7장은 카를 5세의 동생 페르디난트 1세에 대한 이야기이다.
     

    페르디난트 1세
    마리 (한국 위키에는 ‘마리아’ 라고 나옴)


     
    막시밀리안은 공격적인 결혼 정책을 펼쳤고, 그 결혼정책이란게 거의 도박 수준이었다고 느껴졌는데, 각 나라 왕족 후계자들이 운좋게 다 합스부르크 가문 사람들로 구성되는 것만 봐서는 성공율이 좋았다.
    스페인은 무난하게 성공적이었지만, 헝가리는 그렇지 않아서 아들과 딸을 헝가리 왕족과 혼인을 시켰다.
    그 아들이 페르디난트 1세, 딸은 카를과 페르디난트의 누이인 마리 였다.
    그리고 때마침 헝가리왕국과 보헤미안왕국의 왕이었던 야기에우워 가문의 러요시(=마리의 남편)가 일찍 죽어버려서, 페르디난트가 헝가리를 통치할 기회가 찾아왔다.

    야기에우워 가문의 러요시 (=헝가리의 러요시 2세)



    페르디난트가 헝가리 + 보헤미안을 차지하려고 했던 이유: 두 나라 다 세금이 겁나 많이 걷히고 군사력도 짱셈 이었음.

    그러나 헝가리 + 보헤미안 지역은 귀족세력이 더 강력했음
    그래서 페르디난트는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는(즉 기존 세력의 영향력을 어느정도 인정) 절충안으로 해결해야 했는데
    그게 '양형영성체파'라는, 당시에는 이단으로 분류된 교파의 권리를 인정해 주는 방식이었다.
     
    양형영성체파가 뭐냐.. 궁금하면 더보기 ㄱㄱ
     

    더보기

    양형영성체라는게 이 책의 설명도 엄청 불친절하지만 대강은 이해할수 있게 나오는데

    양형영성체가 뭐냐면...

    일단 결론적으로 말하면 성체성사 때 일반 신자도 성체와 성혈을 같이 모신다는 얘기고요, 지금은 이단행위조차 아닙니다.

     

    유대교와 거의 대부분의 개신교들하고 카톨릭하고 구분되는 점이 성체성사를 한다는 건데,

    성체성사가 뭐냐.. 신자들이 '성체(=예수의 몸을 상징)'를 모시는 행위를 한다는 것임

    실상 성체라는게 누구 생살을 뚝 잘라서 먹으라고 하는건 절대 아니고.. 걍 밀로 된 동그랗고 납작한 빵임.. 저 중세시대때도 그렇게 했을진 모르겠는데 애초에 최초이자 최후의 만찬때도 그냥 밀빵으로 의식을 행하였다고 언급되고 있으니.. ㅎㅎㅎㅎㅎㅎㅋㅋㅋㅋ 

    여튼 이 성체를 모시는 행위라는게 어디서 유래가 되었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최후의 만찬"에서 유래함 

     

    명화로도 있쥬...? 

    여기서 예수가 빵과 포도주를 주면서 "이건 내 살과 피고 너네는 나를 기억하면서 이 의식을 행하라"고 말을 하죠.. 

    이 "최후의 만찬"이라는 전체 과정이 "성체성사"이고, 미사 때마다 이걸 합니다. (따로 기도문이 있음)

    신자들끼리는 그냥 "영성체"라고 불러요...

    어떻게 보면 카톨릭 미사의 핵심 중에 하나이기도 합니다.

     

    근데 카톨릭의 초창기에는 어땠을지 모르지만,

    중세 유럽에서는 일반 신자들이 성체(=빵)이 아니라 성혈(=포도주)을 모시는건 금지되었고, 성혈까지 모시는건 오로지 성직자들만 하는 거였다고 함.. 왜인지는 모르겠어요, 성직자들과 교황의 특권의식 때문이었는지 무엇 때문이었는지.. 사실 걍 그 시절에는 카톨릭의 모든게 다 부패했고 문제였어.... ㅠ 

     

    그런데 얀 후스라는 사람이 일반신자도 성체성혈을 둘다 모실 수 있고 그래야 한다고 주장하고, 이 사람을 추종하는 사람들도 늘어나기 시작함.

    원래 이 사람이 주장했던 내용은 영성체에 대한 내용이 주가 아니었구요..

    진짜 찐 부패했던 카톨릭 교회의 부패를 비난하고 성직자 늬들은 청빈하게 살아야된다.. 복음대로 살아야된다.. 뭐 이런거구요..... (매우 정상적) 

    얀 후스는 카톨릭 부패를 비난하면서 평소에 일반 신자들도 성혈을 같이 모시는 양형영성체를 해줬던것 같아욤...

    얀 후스 사후애도 이렇게 얀 후스의 이야기들을 받아들이고 성체와 성혈을 같이 모시는 의식을 하는 사람들이 남았고 그걸 책에서는 "후스의 추종자", "양형영성체파"라고 통칭한 것 같음. 

    얀 후스가 주장한 내용들에 대해 당시 카톨릭에서는 "이단"으로 규정을 하고 얀 후스를 파면까지 했다고 하네요... 결국 화형시켰다고... 어휴 미친놈들;;;

     

    지금은? 

    1) 얀 후스는 체코의 종교개혁을 이끌어낸 기독교 신학자이자 루터와 비슷한 종교개혁가로 평가되고 있고요,

    한글 위키 참조: https://ko.wikipedia.org/wiki/얀_후스

    후스파/양형영성체파는 그뒤로 어케 되었는지는 모르겠고... 그냥 개신교의 한 종파 정도로 발전하지 않았겠나 싶네요...

     

    2) 양형영성체라는 것 자체는 어떻게 되었냐 하면, 현재도 사용되는 용어입니다. 불법 아니고요... 금지사항 아니고...

    지금은 매주 모든 신자들이 성혈까지 모시지는 않는데, 어쩌다 가끔은 합니다. 

    종교적으로 특별한 날이나 신자의 요청 또는 성직자(=신부)의 허락이 있으면 일반신자들도 빵과 포도주를 같이 모시는 방식으로 성체성사를 진행하기도 함... 이런게 딱히 교회법의 위반사항이 아니고, 성직자에 따라 '신자라면 성서에서 말하는 곧이곧대로 성체와 성혈을 모시는 것도 해봐야 된다'며 권장하시는 분이 있기도 할 정도입니당...

     
    형이나, 동생이나...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이 정치적 행보...
    보헤미안은 이걸로 퉁치는게 가능했는데, 헝가리는 이조차도 어려웠다.
    헝가리 의회가 내세운 후계자와 결국 내전을 했고, 페르디난트가 이긴다.
     
    참고로 페르디난트 1세 업적이 찾아보면 되게 많은데 카를 5세 집권 기간하고 좀 겹치는 바람에 카를 5세의 업적으로 잘못 알려진 경우가 많다고 함. 
    일단 개신교의 종교의 자유를 인정한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도 페르디난트 1세 작품이었다고 함 
    https://namu.wiki/w/아우크스부르크%20화의

     

    아우크스부르크 화의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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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mu.wiki

     
    읽어보니 카를 5세의 말년 평가와 사뭇 다른 페르디난트 1세에 대한 평가도.. 느낄 수 있었음.
    근데 저는 첨 알았는데 여기서 루터파만 인정되고 칼뱅파는 인정이 안되었다고.. 또다른 종교전쟁 불씨의 서막이구만.. 
     
    여튼 이 챕터를 읽으면서 내가 느낀 점은... 페르디난트 1세가 중앙 유럽쪽 합스부르크 가문의 시조 격이 된 듯함. 
    왜냐면 카를 5세 이후로 더 이상 스페인과 중앙유럽을 동시에 같이 통치한적은 없었기 때문...
     
     
     




    8장
     
     

    펠리페 1세
    카를 5세 (=스페인의 카를로스 1세)
    펠리페 2세

    스페인 쪽 합스부르크 가문은 펠리페 1세 -> 카를 5세 -> 펠리페 2세로 가계도가 이어짐.
    8장에서는 펠리페 2세 치세에 대한 설명을 한다..
     
     
     
     
    책에서 언급된 펠리페 2세의 업적

    1) 펠리페 2세 때 에스코리알 궁전 건축
    책에는 안나왔는데 프랑스한테 승전한 기념으로 짓기 시작했다고 함. 이 책에는 궁전이라고만 나와서 그냥 궁전인줄 알았는데 위키를 찾아보니 수도원도 있고 왕이 기거하는 궁전도 있고 가족묘도 있는 굉장히 복합적인 공간이라고 함.
     

    엘 에스코리알 (출처 : 트리위키)
    에스코리알 궁전 영묘 내부


    에스코리알은 합스부르크 가문 사람들의 가족묘가 되었다.
    심지어 헝가리의 러요시 2세와 결혼했던 마리의 시신도 에스코리알에 안치함.

    아까 만났던 마리



    2) 신실한 카톨릭 신자여서 개신교도를 탄압함. 이슬람교도들과 유대인도 탄압.
    유대인의 경우 펠리페 2세가 신대륙에 종교 재판소를 만들어서까지 탄압을 피해서 식민지로 이주해온 유대인까지 탄압했다고 함... 혐오감정 발산하는데 열정이 넘치네... ㅎ;;;;
     

    네덜란드 공화국


    그 결과 저지대국가 중 북부 7개 주는 "네덜란드 공화국"으로 독립하게 됨.
    그냥 단순 종교탄압의 이유만 있는건 아니었고, 계속되는 전쟁으로 군대 유지에 필요한 세금 조달을 위해 현지 귀족 세력을 누르고 자금을 쥐어짜는 바람에 반발이 생겼다고 함.
     
    3) 영토 확장
    멕시코, 중앙 아메리카와 플로리다 지방 통치, 남아메리카 지역에도 확장하여 지배
    포르투갈은 혼인 정책의 결과로 지배
    당시 스페인에서 중국을 침공할 계획도 세웠다고 한다. 군사 6000명으로... (꼴랑?)
     

    펠리페 2세 당시 스페인 영토 (1598년)


    그래도 위키 찾아보니까 펠리페 2세의 식민지배는 원주민들을 다 노예로 부리는 무식한 방식의 식민지배가 아니라 관료를 보내 관리하고 통치하는 중앙집권방식의 지배였다고 함 심지어 노예제를 금지했다고...
    아무리 그래봐야 본질은 식민지배였겠지만.. 필리핀만 봐도 몇백년간을 스페인령인 채로 살았던 거에 국민들이 악감정 같은게 없는 편이고(심지어 필리핀도 일본에게 지배당했던 시절을 더 극혐함), 워낙 악마같이 식민지 통치한 놈들이 수두룩 빽빽이라는 점을 떠올리면 상당히 상식적인 범주가 아니었을까 함..^^ 뭐 우리나라랑 바로 옆나라만 봐도~

    펠리페 2세의 지배정책은 유럽+아프리카 북부에 한해 카를 5세 때 약속한 융화 정책을 고수해서, 현지 귀족들의 권리를 공고히 하는 방식으로 진행이 되었음
    >> 원래 가지고 있던 부패 등의 문저는 더 강화됨
    >> 말 안 통하는 곳은 그래도 군사력 활용해 진압했다고 함

     
    4) 9장에서는 아니고 뒤에 언급되는데, 펠리페 2세가 진짜 세세한 부분까지 국정을 다 살폈다고 함. 
    위키에는 카를 5세하고 자주 비교되는 바람에, 압박을 많이 받아 고생한 결과라고 설명하더라고여?.. 
    뭐.. 그렇다고 함..
     
     

    후아나 1세
    돈 카를로스

     
    그리고 점점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행해지는 근친혼의 문제점이 외모적 부분 말고도 드러나기 시작한다고 언급.
    특히 후아나 1세는(펠리페 1세와 결혼한 스페인 왕족, 아들이 카를 5세, 손자가 펠리페 2세) 우울증이 있었고, 근친혼이 반복되면서 근친혼의 부작용(특히 정신질환)이 펠리페 2세의 큰 아들인 돈 카를로스에게서 발현되었다고 설명하였다.
    후아나 1세 같은 경우 스페인 왕가에서 계속 이어져온 근친혼 상황이 이미 있었고, 합스부르크 가문도 만만찮게 근친혼을 일삼았기 때문일 거라고 책에서는 설명하고 있었다.
     
    여튼 돈 카를로스는 신체장애를 갖고 태어나고, 정신병과 망상에도 시달렸다고 함. 
    돈 카를로스는 젊은 나이에 감옥에서 굶어 죽은 듯하다고 언급됨. 펠리페 2세가 자기 큰아들을 독살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는데 그건 아닌거 같다고 저자가 선그은것.

    위키에서는 후아나 1세의 정신질환이 날 때부터 있었던 것 같지는 않고, 날 때부터 우울증을 타고난 정도도 아니었을거라고 추측하고 있었음. 그냥 살짝 우울함이 있었던 정도인데 하도 유폐된 기간이 길어서 정신질환으로 발현된 것이 아닐까 라고 설명하고 있었음. 그래서 왜 이 책의 저자는 후아나 1세가 '카스티야의 광녀'라고 단정지어 언급했는지.. 개인적으로 좀.. 궁금해짐. 그냥 단순히 별칭을 언급한 것인지..? 아니면 책 쓰면서 확인한 별도의 사료가 있었을지..
     
     


     

    9장
     

    펠리페 2세
    마리
    마르게리타
    돈 후안

    이번 챕터는 카를 5세의 자녀들에 대한 이야기다. 이 책 앞장의 가계도에 나와있는 카를 5세의 자녀는 스페인의 펠리페 2세, 마리, 마르게리타(사생아), 돈 후안(사생아).
    마리는 나중에 페르디난트 1세의 아들(즉, 본인 친 사촌)과 혼인을 한다.


    돈 후안은 펠리페 2세의 치세에서 했던 것 중에서 이슬람교도들의 반란 진압을 했었음.
    레판토 해전에서 이겼지만 펠리페 2세의 실책으로
    전쟁에서 이기고도 패배한 꼴이 되었음
    결국 우울+전염병+매독 콜라보로 젊은 나이에 사망
    (우울과 매독은 저자의 추측)

    위키를 더 찾아보니 펠리페 2세랑 나이차이가 20살이나 났는데 돈 후안이 왕족으로 편입이 된 이후에 펠리페 2세가 공부하는거 챙겨주면서 엄청 아꼈다고 함..
    비교적 똑똑하고 능력있는 합가문 사람이었지만 젊은 나이에 요절해서 안타깝다는 평이 대부분인것 같다
    이 책에서는, ‘레판토 해전 승리로 돈 후안이 얻은게 있다면 그의 시신이 스페인 에스코리알 궁전에 안치된 것’이라고 언급했다. 합스부르크의 사생아 중에서는 유일하다고..



     

    10장

    페르디난트 1세
    막시밀리안 2세
    루돌프 2세


    중앙 유럽의 왕위는 페르디난트 1세 > 막시밀리안 2세 > 루돌프 2세 순으로 상속이 됨
    10장은 루돌프 2세의 연금술 이야기 +우울증 이야기이다.

    중앙유럽의 합스부르크 가문은 막시밀리안 2세 때부터 카톨릭에 아주 신실하지는 않게 되었다고 하는데,
    이게 그냥... 죽 읽으면서 느낀건데... 얘들이 종교는 카톨릭이지만 딱히 다른 개신교도들 박해를 안했거나 상대적으로 덜 했다 정도의 표현 같았다.
    카톨릭에 미친자 즉 카친자였던 스페인의 펠리페 2세가 막시밀리안 2세의 신앙심을 몰래 파악해 보고하라고 하기도 했다고 함... 진짜 카친놈이다...

    책의 이 챕터에서 작가는 루돌프 2세는 우울한 기운이 느껴졌다고 언급.
    더불어 연금술에도 심취하여 협잡꾼들까지 모여들었다고 함
    책에서 말하는 루돌프 2세 치세의 요점은 ‘황제임에도 아무런 정치적 결단을 내리지 않았다’는 게 문제라고 함....




    확실히 분량이 길어져서... 글을 나눠 쓸게요...
    공부하면서 읽으니 재밌기도 하지만 체력이 달리네요 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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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 외에 참고한 글..

     

    * Radbot of Klettgau https://en.wikipedia.org/wiki/Radbot_of_Klettgau

    * Joanna of Castile - Disputed mental health claims https://en.wikipedia.org/wiki/Joanna_of_Castile

    * 얀 후스 https://ko.wikipedia.org/wiki/얀_후스

    *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나무위키) https://namu.wiki/w/아우크스부르크%20화의

    * 엘에스코리알 https://ko.wikipedia.org/wiki/엘에스코리알

    * 펠리페 2세 https://ko.wikipedia.org/wiki/펠리페_2세

    * 펠리페 2세(나무위키) https://namu.wiki/w/펠리페%202세

    * John of Austria https://en.wikipedia.org/wiki/John_of_Austria

    * 돈 후안 데 아우스트리아(나무위키) https://namu.wiki/w/돈%20후안%20데%20아우스트리아

    * 인물사진 출처는 모두 위키피디아와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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